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최영미,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너무 짧게 만나 헤어진 지난 여친이 떠올랐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만났고
그래서 서로를 더 알기 전에 헤어졌던
허무를 추억한다.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최영미, <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너무 짧게 만나 헤어진 지난 여친이 떠올랐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고 만났고
그래서 서로를 더 알기 전에 헤어졌던
허무를 추억한다.
단편을 좋아한다. 장편보단 단편을 좋아한다. 원체 소설을 잘 안 읽지만 유명한 사람의 단편집은 곧잘 읽는 편이다. 근데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좋은 소설가의 단편집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항상 찾아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왜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을 받았으니 작품성은 의심할 여지 없고, 여러 사람의 단편을 한꺼번에 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이상문학상이 단편(혹은 중편)만을 심사한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는 가끔 단편이 읽고 싶을 때 아껴 놓은 아이템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읽으면서 밑줄 치고 싶은 문구를 메모해 둔다. 수록된 모든 작품을 다 읽진 않았고,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 김종관ㅇ의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 윤성희의 '어쩌면', 박민규의 '낮잠'을 읽었다.
사랑과 믿음, 상당히 어려운 조합이다. 그나마 소망은 뺀다 쳐도, 사랑과 믿음 중 하나만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터에 감히 둘을 술목 관계로 엮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니. 믿음을 사랑한 적이 있다는 말 만큼이나 뭐가 뭔지 모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권영선, '사랑을 믿다.' 12 페이지
심근경색입니다. 병원을 나와 혼자 걷던 그 길이 지금도 생각난다. 앰뷸런스가 한 대 지나갔고, 지자제 선거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오토바이를 세운 퀵이 휴대폰으로 위치를 묻고 있었고, 그럼 천 원 더 주셔야 합니다, 했고 일 열심히 하게습니다, 선거운동원들이 구십 도로 인사를 하고, 만삭의 젊은 처자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고, 그 옆엔 우체통이 있고, 다릴 저는 어떤 남자가 한 묶음의 신문을 내려놓았고, 가로수는 푸르렀고, 기사식당에서 나온 운짱들이 커피를 든 채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고, 구구 비둘기들이 인도 위를 걷고 있었고, 나는 심근경색이었다.
-박민규, '낮잠', 255~256페이지
지난 세월을 돌이키는 일은 어둠 속에서 무성영화를 보는 일과 매우도 닮아 있었다.
-박민규, '낮잠', 260페이지
하긴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가 나같이 평범한 남학생을 기억할 리 없다. 말하자면 나는, 헵번의 영화에 출연한 추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불만은 없다. 별이 인간을 헤아릴 순 없으니까. 오로지 인간이, 별을 헤아릴 뿐이니까.
-박민규, '낮잠', 265페이지
마음의 양변기
마음에 양변기 하나 두고 싶다
마음에 누가 가래침 내뱉으면 물 내리고
마음에 누가 오줌 누면 물 내리고
마음에 누가 똥 누면 물 내리고
언제나 맑은 샘물 가득 채워두고 싶다
내 마음 똥통 오줌통이어서
마음에 깊은 욕창 아물지 못하고
피고름 고이고 구더기 들끓는 날
마음에 양변기 놓아 물줄 당겨
쏴아아 쏴쏴 다 씻어 내려버리고 싶다
오욕에 오염된 오장육부 다 내려버리고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마음 다 내려버리고
양변기 하나 놓아두고 살고 싶다
쌀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 같이 귀중히 여겨 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이라는 비밀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학교 도서관 시 코너에서 아무 책이나 뽑았다. 가끔은 이렇게 무작위에 맡긴다. 의식적으로 행동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걸 가끔 얻으니까. 그렇게 뽑은 게 이 책인데, 사실 그런 무작위적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적다. 시집은 전반적으로 상투적이었다. 그리 건질 것은 없었지만 위 두 시는 그래도 기록해 둔다. 떠오른 생각을 풀어썼을 뿐이지만 그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