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겨울 洞口'

2012. 7. 19. 01:47

겨울 洞口


잎 가지지 못한 삶이 서 있고

사람 없는 집들이 즐비한 길 위로

밭이 있고 포도나무가 있다

포도나무는 밭을 포도밭으로 만들고 있지만

길들이 모두 집에 와 닿는 저녁이 와도

빈집들은 이 마을을

빈 마을 이외로는 만들지 못한다

잎 가진 삶이 다 유배당한 

겨울 洞口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빈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포도나무만 덩그러니 있다. 포도밭이 있는 것은 그래도 손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데, 마을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다. 삶에선 잎들이 떨어져 나가고 가을이다. 아니 낙엽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새순이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공허함. 앙상함. 빈 마을은 내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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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저녁의 우울'

2012. 7. 19. 01:43

저녁의 우울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 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청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덧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하겠다는 뜻일까.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풍경들에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은 풍경과는 상관 없는 일로 지쳐있거나, 틀어져있거나, 애잔하게 가라앉아 있었겠지만 풍경은 거기에 물결을 일으킨다. 가라앉아 있던, 꾹 참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도대체 지금 이 순간을 어찌해야 되는지 풍경에게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바람소리 뿐이다. 그래도 그것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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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보면 그 시 전체의 이미지가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아니지만 한 구절이 마음 깊숙히 들어올 때가 있다. 그때는 그 구절만 따로 기록해 둔다. 언젠가 다시 열어보며 마음을 환기시키거나, 다른 곳에 인용하기 위해서다. 장석남의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서 밑줄 친 문장들이다. 




"앵두나무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앵두꽃잎을 내밀 듯" 


-장석남, '5월' 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서풍에 휘어진 붉은 햇살들을 붙잡고"


-'풍적 6 -한강변' 중, 같은 책. 




"아들이 업고 있는 아버지풀

비가 몰아치면

업은 아버질 내려놓지 못해

같이 엎어지는 


비 맞는 잠"


-'비 맞는 잠' 중,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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