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용산에서'

2012. 7. 19. 02:03

용산에서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은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와 이상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이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오규원 전집에서



시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삶 밖에.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가끔은 근사한 詩밖에. 



Posted by 소리끝
,

그리고 우리는

-순례 10


살아 있는 주검의 비밀은 주검만이 안다. 

우리가 주검이 두려운 건 

우리가 주검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주검의 입을 막고

귀를 막고 코를 막는다.

그 다음 일어나지 못하도록

관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지하에 묻은 뒤

흙으로 봉분을 쌓아올린다. 


주검은 팔다리가 묶여 일어설 수 없고

입에 흙이 가득 차

맛있는 제삿밥도 먹을 길이 없다.


웃지 마라. 비로소 우리는 

주검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안심하고 제사상에 다가가

배불리 먹고 마시며 낄낄거린다.

그러나

주검은 한잔할 길이 없다. 


-오규원, <오규원 시전집 1>, 문학과지성사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를 땅에 묻는가. 


Posted by 소리끝
,

오규원 시, 메모

2012. 7. 19. 01:53

오규원 전집을 읽다 기억해 두고 싶은 표현들을 갈무리한다. 



길이 끝난 곳에 

산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오규원, '들판' 중 




한 짝 신발에 괸 광우량 


-'우O의 시' 중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중 




누가 '오, 하느님!' 하는 소리를 옆으로 지나가던 다른 사람의 의복이 재빨리 흡수해버린다. 


-'저녁때' 중 

Posted by 소리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