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나는 저 아이들이 좋다. 조금만 실수해도 얼굴에 나타나는 아이, '아, 미치겠네' 중얼거린느 아이, 새로 산 신발 잃고 종일 울면서 찾아다니는 아이, 별 것 아닌 일에도 '애들이 나 보면 가만 안 두겠지?' 걱정하는 아이, 좀처럼 웃지 않는 아이, 좀처럼 안 웃어도 피곤한 기색이면 내 옆에 와 앉아도 주는 아이, 좀처럼 기 안 죽고 주눅 안 드는 아이, 제 마음에 안 들면 아무나 박아버려도 제 할 일 칼같이 하는 아이, 조금은 썰렁하고 조금은 삐딱하고 조금은 힘든, 힘든 그런 아이들. 아, 저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내 품에 안겨들면 나는 휘청이며 너울거리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이성복, <달의 이마에도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저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내 품에 안겨들면 나는 휘청이며 너울거리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든든하게 품어줄 기둥이 된다. 어떤 아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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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이 나를 피해 가는 시절 

네 손을 잡으려는데 손이 없다면? 네 몸을 안으려는데 몸이 없다면? 네 밑을 내게 주는데 밑이 없다면?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어, 늙어 가는 몸을 찬찬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 입가는 내려앉고 손거죽 쭈그러들고 여윈 팔 몹시 후들거리고, 그리하여 이제 내가 욕망하는 사람의 욕망이 될 수 없다는 것, 이제는 내가 욕망하는 누구도 나를 제 욕망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리라는 것, 마주 오던 나를 보고 골목으로 피해 가던 중학교 때 친구처럼, 지금은 묵묵히 생이 나를 피해 가는 시절.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나이듦의 슬픔. 더 이상 내가 욕망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슬픔과 서러움. 말하지 않을 뿐이지 그들은 모두 느끼고 있다. 자신의 피부는 쪼그라들어도 욕망은 쪼그라들지 않기에 그것을 찌그러뜨려야 한다. 서로를 위로 할수밖에 그 위로 또한 욕망을 충족시켜주진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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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야, 넌 참 좋겠다


선풍기 바람을 머리에 쐬니 정신이 하나 없고 이러다 감기 걸릴 것 같다. 선풍기 목을 꺾어 다리 아래로 쐬니 시원하기 그만이고 머리도 안 아프다. 다리는 머리가 없으니 바람을 쐬어도 불평이 없고, 오히려 좋다고 한다. 다리에 바람 불면 머리는 즐겁고, 머리의 즐거움은 곧장 다리로 가니, 머리의 즐거움이 다리의 즐거움이다. 머리에 선풍기 바람을 쐬게 해서는 안 된다. 머리는 감기도 잘 걸리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도 감기도 머리가 대신하니 다리야, 넌 참 좋겠다.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열림원 



마음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있다. 몸이 편해도 마음은 머리는 불편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는 예민한 감각들이 모두 모여 있는 머리는 언제나 고달프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까지 모자라 몸통에서 오는 고통도 머리의 몫이다. 그게 우리 머리고 우리는 누구나 머리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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