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비애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
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
제 몸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
백합은 제 입김과 제 눈매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산다는 것
그것을 알고부터 나는
하필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
몸이 생각을 버릴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단명한 친구는
아침이슬이라도 되는데
나는 참!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슬펐다
-박라연, <설운 서른>, 버티고
나도 언젠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결코 오고 싶지 않은 그 날. 스물 서른이 마냥 그리운 그 날. 지금을 그리워 할 것이다. 소나무도 오이도 백합도 되지 못하고 그리움도 지칠 때 쯤 우리는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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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시첩
스무 살 나이엔 봄바람의 설렘을 알았고
서른 살 나이엔 꽃 지는 설움을 알았는데
마흔이 가까워오니 꽃 피는 장관에 눈이 감아지더라
(후략)
-김소연, <설운 서른>, 버티고
설렘을 지나 설움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간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지는 꽃은 더욱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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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의 병력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시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
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 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이기선, <설운 서른>, 버티고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을 때 주머니를 뒤져보니 시가 되지 못하고 구겨져버린 말들이 만져진다. 담배를 거꾸로 꼬나물었지만 불을 붙이기 전이라 알지 못했다. 불은 시가 되지 못한 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다른 프로메테우스를 찾아야 했다. 행간을 메우는 말하지 못한 말들 사이로 풀이 자랐다.
Posted by 소리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