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찾아온다

비가 찾아온다.
기억을 더듬듯
윗잎에서 아랫잎으로
잎에서 잎으로 튀어 오른다.
돌을 디뎌 스며들다가
한 겹 돌의 피부가 될 때까지
비는 구석구석 찾아든다.
빗방울 주렴에 굴절되는 산
가슴 안으로 울새 한 마리 재빨리 숨어들고
도로 아스팔트 위에
텅 빈 소로 흙 위에
비의 발자국.
옥수수 잎, 감자 잎, 상추 잎, 완두콩 잎
위에도 빠짐없이

비의 발자국.
농가 뒤꼍 주인 없는 수돗가
비어 있는 고무 다라이 안에 모여들고,

막혀서 고인 한적한 수로
죽어 있는 검은 물 표면을 소란스럽게 하고,
죽어 있는 검은 날들을 들쑤시며 깨운다.

죽은 기억을 소생시키듯
비가 찾아온다.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



비를 관찰한다. 빈틈없이 파고 흐르는 비는 심상을 가득 채운다. 땅 위의 모든 것은 비막을 입고 흐리게 반짝인다. 몸 구석구석을 씻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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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를 통해

당시은 나를 통해
당신의 불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를 몰랐다면
행복에 눈멀었을 거라고 하는군요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것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도 하는군요

당신은 나를 통해
당신의 행복을 알았다고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당신의 행복을 알았다고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한 사람을
당신 곁에 영원히 남겨두고 싶기 때문인가요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로 인해 당신이 불행해질수밖에 없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내게서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럼에도 나를 사랑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쩔 줄 모르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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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돌 - 채호기

2011. 4. 12. 04:43
물과 돌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나?
물의 손 아니면 돌의 손?

물은 온몸이 입술
말하려는 듯이 오므려 내민다.
돌은 입술 속의 이빨
딱딱하게 앙다문 채
말을 삼킨다.

젖가슴에 파묻힌 작은
아기 얼굴
물렁물렁한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들
이건 모두 돌의 욕망

부드럽게 혹은 딱딱하게
감싸며 궁굴리는 혀
숨 쉴 틈 없이 짓눌러오는
완벽한 압력
이건 모두 물의 욕망.

돌 속의 입술
물 속의 이빨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



물 속에 손을 집어넣고 돌을 만진다. 흐물거리는 시야 속의 돌은 에로틱한 감각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욕망은 돌의 욕망, 물의 욕망으로 전가된다. 이건 모두 나의 욕망, 깊은 입술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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