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던지기
방학중의 딸과 함께 공던지기를 했다
서투른 것이 사랑이었다
좀 세게 던져주면
잘 튀는 공이
딸의 키를 넘어갔다
딸의 공이 와서 튀면
내 키도 넘어 저만치 떨어졌다
깔깔깔 딸의 웃음이
단풍나무 잎새들을 떨어뜨렸다 늦가을이었다
나도 세게 던진 뒤 땀을 훑어내면서
하늘을 보았다
비행운 하나도 없다
하늘에는 어떤 왕조도 없다
텅 빈 저승
거기에 공을 잘못 던졌다 딸이 깔깔 웃었다
-고은, <두고 온 시>, 창작과비평사
딸과 함께 공을 주고 받는 시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저승에 던진 공에 잘못 던져서 딸이 웃는다. 평화롭다
늦가을 붙잡을 것도 없고 쫓길 것도 없는 날.
웃음소리가 청명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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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 바다에서
벌거숭이 산등성이 같은 다른 나라들의 고통을 모르는 구두쇠로
내 나라의 갖가지 고통만을
큰 소리로 떠벌여왔다
한국통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런 책들의 뚜껑을 덮고 떠나왔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적도 부근
나 혼자 세상 멀리 면목이 없다
세상은 갈수록 팍팍하다
여기는 누구나 죽으면 바로 물컹물컹 썩어버리는 곳이다
그토록 오랜 동무였던
수평선은 거짓이다
모든 태풍
모든 태풍 이전의 미풍
모든 것을 가진 일망무제의 파도 앞에서
나는 가방을 쌌다
-고은, <두고 온 시>, 창작과비평사
한국의 가슴아픈 근대사를 어루만져온 시인이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 아직도 살고 있는 민중들을 본 고은은 마음이 숙연해진다. 자기가 가장 힘들다고 투정하는 사람이었던 듯이 고은은 자신의 불찰을 반성한다. 누구보다도 더 민중을 위해 시를 써왔던 그에게 타국의 (가치 판단 없는) 후짐은 또 다른 짐으로 다가온다. 넓은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힘든 친구를 만난듯이.
Posted by 소리끝
아내의 브래지어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희, <설운 서른>, 버티고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쑥스럽게 섬세하다.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작은 행복이다.
Posted by 소리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