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다'와 '젊다'

2011. 2. 21. 22:09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에서 '늙은'은 동사 '늙다'의 과거형이고, '젊은'은 형용사 '젊다'의 현재형이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늙다'와 '젊다'가 어휘의 같은 층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지 못하다. - 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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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관비 도미 유학생 유길준은 1877년부터 1882년까지 동경제국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강의한 미국인 진화론자 에드워드 모스 교수의 제자가 되기로 자청한다. 그는 모스 교슈 밑에서 일반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을 배웠다. 첫 근대 미국 유학생 유길준이 배운 학문이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쓴 <경쟁론>의 서두에 그는 다음과 같이 경쟁을 찬양한다.

대개 인생의 만사가 경쟁을 의지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크게 천하 국가의 일부터 작게 한 몸 한 집안의 일까지 실로 다 경쟁으로 인해서 먼저 진보할 수 있는 바라. 만일 인생에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어떤 방법으로 그 지덕과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가? 만약 국가들 사이에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어떤 방법으로 그 광위와 부강을 증진할 수 있는가? 대개 경쟁이라는 것은, 무릇 지혜를 연마하고 도덕을 닦는 일부터 문학, 기예, 농공상의 백반 사업까지 사람마다 그 고비우열을 서로 비교하여 타인보다 초월하기를 욕심내는 일이라. (231p)
120년도 더 된 글에서 작금의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실은 놀랍다.
물론 최초의 도미 유학생이 '사회진화론'을 배웠기 때문에 현재 한국사회가 경쟁지상주의가 된 것은 아니다. 우연이겠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지금의 승자독식 사회는 100년 전 조선 사회를 휩쓸었던 사회진화론을 처음 받아들인 개화지식인들로 이어져 온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사회진화론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음은 시대상황을 통해 변호가 된다. 문제는 그 이후 사회진화론에 대한 의심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또 강조했던 후대 지식인들의 역할 부족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강제적 세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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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중국의 전통을 전면 부정하고 유럽 지배층의 논리인 사회진화론에 매달린 것은, 그들의 '외래성'과 매판적인 성격의 노정이기도 하고, '영국과 일본 따라잡기'라는 근대주의적 욕망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중국 사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그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세계적 문명사회'에서도 예속적 위치에 있는 소수자, 약자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이 자행되던 당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주변부 국가의 지식인들은 모순된 상황에 있었다. 약육강식의 세계를 받아들였지만 정작 자신들이 속한 나라는 '약'이라는 주변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순성을 탈피하기 위한 길은 두가지였는데, 한가지는 제국주의적 침략에 부분적으로나마 비판적인 날을 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자신의 나라를 하루 빨리 '약'에서 '강'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 자체가 노력 여하보다는 유적전인(인종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또다시 모순에 빠진다. 즉, 사회진화론에서는 동양인은 체질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모순적인 논리들을 만든다. 가령 조선의 개화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민족'은 다르다는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한민족의 우수성' 드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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