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의 병력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시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
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 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이기선, <설운 서른>, 버티고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을 때 주머니를 뒤져보니 시가 되지 못하고 구겨져버린 말들이 만져진다. 담배를 거꾸로 꼬나물었지만 불을 붙이기 전이라 알지 못했다. 불은 시가 되지 못한 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다른 프로메테우스를 찾아야 했다. 행간을 메우는 말하지 못한 말들 사이로 풀이 자랐다.
Posted by 소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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