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으려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노력을 놓았을 때 깨달음은 온다고 오쇼는 말한다.

"어떤 것을 찾는 것을 그만 둔 그날,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던 그날, 그것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오쇼는 2년 동안 규율 속에 살았다. 철저한 규율 속에 깨달음을 갈구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그 노력을 놓았을 때 찾아왔다. 아니 노력이 놓여졌을 때 찾아왔다는 것이 정답이다.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깨달음이 찾아오기 위해서는 그 노력이 필요했다. 다만 그 노력을 놓는 순간이 와야 한다. 아니 그것은 오게 된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떤 발악을 하는 것도 좋다. 어차피 그 노력이 없으면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고, 그 노력을 놓는 것 또한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나는 욕망을 절제할 수 없다. 그것은 인위일 뿐 댐에 물이 차듯 욕망을 잠시 가두어두는 것이다. 언젠간 댐의 물이 넘치면, 혹은 댐이 무너지면 그 욕망은 다시 자신을 홍수 속에 빠뜨릴 것이다. 욕망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거부하지 말고 관찰하기. 관찰하고 이해하기. 깨닫고 싶은 마음 또한 욕망의 하나다. 그 욕망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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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오쇼 라즈니쉬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틀렸다고 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한계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 또한 하나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버리려는 것 또한 욕망이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놓아질 때 잠재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가보다. 그럼 처음에는 욕망을 위해 달려가야 할까. 어차피 욕망을 버리려는 것도 욕망이라면 차라리 욕망의 충족을 위해 매진하게 되면 결국 그 충족 뒤에 오는 허무감 속에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을 놓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은 자기 합리화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추구할 수도 없고, 추구하지 않아서도 안되며, 욕망을 모두 다 달성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럼 다시 그 부족한 욕망을 채우려고 할테고, 욕망을 거부할 수도 충족시킬수도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이후의 허무감을 느끼기 위한 예비단계다. 그걸 의식한다면 또 깨달음에 다달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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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오쇼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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