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를 바라보았다지만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네 


-김소연, '그날이 그날 같았네' 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나를 보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내가 없던 적이 있었다. 거기에 나만 외로이 반사되어 내 눈에 다시 비쳤다. 너를 바라고 바랐던 마음은 네 눈에 다다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손이


내 다섯 손가락으로 당신 손등을 꽉 감싸고 

당신의 손바닥을 내 손바닥에 빈틈없이 맞붙이고

당신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와 

봉합된 이 모양을 눈 떼지 않고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이 구겨진 길을 따라 걷는다


한 쌍의 다정한 말똥구리처럼

지구를 굴리며 걷는다 태양을 향하여 직진으로 걷는다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지문 하나 남지 않게 닳고 닳도록 

그러므로 말똥 같은 지구를 

우주 벼랑 끝으로 굴려 떨어뜨리도록


당신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봉합된 채

이 조그만 지구에 그늘과 밤을 수천 번 드리울 때

우리 뒤에 깔린 반듯한 비단길을 아무도 걷지 말거라

벼랑 끝 노을이 우리 이마에 새겨주는 불립문자를

아무도 읽지 말거라 


-김소연,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가>, 민음사. 




Posted by 소리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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