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생각의 좌표
저자: 홍세화
출판사: 한겨레출판
[1] 독서와 토론, 글쓰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스갯 소리는 진실에 가깝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닞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28p
[2] 자주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학습'이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배우고 익힘'이라는 뜻을 모르는 이야 없겠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습(習), 즉 '익힘'이다. '배움' 없이 인권의식이나 연대의식을 형성하기 어렵지만 배움만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몸에 익히지 않으면 공염불에 머물기 쉽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하려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다. -28p
[3]봉건사외에서 신의 '명령'(order)으로 받아들여졌던 신분 '질서'(order)는 인류 역사상 인간에게 강제된 질서 중에서 가장 무섭고도 강고한 것이었다. -60~61p
[4] 20세기 초 유태인 청년은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아, 난 유태인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게르만인 독일인은 자고 일어난 아침에 "아, 난 게르만이야"라고 확인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유태인에게 독일인들은 걸핏하면 "너, 유태인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 자고 일어나는 그 어느 아침에도 스스로 "아, 난 게르만이야"라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없는 독일인에게는 "너, 게르만이지?"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중략) 또한 "너, 서울 사람이지?", "너 경상도 사람이지?"라고 묻는 일은 거의 없지만,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묻는 일은 이따금 일어난다. (중략) 성 소수자들이 스스로 성 소수자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너, 동성애자지?"라는 물음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소수자들은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135~136p
[5]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본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진다'는 뜻인데, 역사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귀족은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았다.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으면 지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배하기 위해 의무를 져왔을 뿐이다. 그게 역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귀족이나 사회상층이 스스로 의무를 얼마만큼 지느냐는 국민의 비판과 견제 능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역에서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당키나 한가.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사회상층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민중의 비판적 안목과 견제 능력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1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