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접착제 - 채호기
소리끝
2011. 4. 12. 05:27
접착제
어떤 생각은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다.
생각은 귀 같다. 가끔 거울을 볼 때, 낯설은
이물 같은, 그러나 얼굴과
뗄 수 없이 한 덩어리인 귀.
어떤 생각은 빠르고 귀찮은 애완동물인데,
어떤 생각은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머리에서 꼼짝 않고 떨어지지 않는다.
나와 생각을 단단하게 붙이는 접착제는 뭘까?
생각하면, 생각은 점점 커지고 무거워질 뿐
생각은 내 몸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은 생각을 먹고 자라고
어떤 생각은 제자리에 붙어서도 수천 리를 갔다 온다.
하지만 끝까지 생각은 꼼짝 않고 붙어 있다.
생각은 혹이나 티눈 같아서
내 몸 같지만 내 몸이 아니다.
어떤 생각은 어떤 생각을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접착제다.
칼로 썰거나 발로 짓밟아도
생각은 줄어들지 않고 내 몸만 아프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는 다짐도 생각.
다른 생각과 경쟁하고 다투고 맹렬해지는
생각은 한 번도 생각 밖의 세계를 생각하지 못하고
몸 밖의 전체를 조망하지 못한다.
생각이 기생하는 몸은 감각이 무뎌진다.
허나, 이것도 생각이다.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
생각을 말한다. 떨어지지 않는,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쓸어가는 생각.
그 생각을 피하기 위해 쌓아놓은 모래성은 어김없이 파도 한번에 부서지고 만다. 생각을 피하게 해 줄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다 한 패이기에. 허나, 이 생각도 한 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