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찾아온다 - 채호기

소리끝 2011. 4. 12. 05:17
비가 찾아온다

비가 찾아온다.
기억을 더듬듯
윗잎에서 아랫잎으로
잎에서 잎으로 튀어 오른다.
돌을 디뎌 스며들다가
한 겹 돌의 피부가 될 때까지
비는 구석구석 찾아든다.
빗방울 주렴에 굴절되는 산
가슴 안으로 울새 한 마리 재빨리 숨어들고
도로 아스팔트 위에
텅 빈 소로 흙 위에
비의 발자국.
옥수수 잎, 감자 잎, 상추 잎, 완두콩 잎
위에도 빠짐없이

비의 발자국.
농가 뒤꼍 주인 없는 수돗가
비어 있는 고무 다라이 안에 모여들고,

막혀서 고인 한적한 수로
죽어 있는 검은 물 표면을 소란스럽게 하고,
죽어 있는 검은 날들을 들쑤시며 깨운다.

죽은 기억을 소생시키듯
비가 찾아온다.

-채호기,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



비를 관찰한다. 빈틈없이 파고 흐르는 비는 심상을 가득 채운다. 땅 위의 모든 것은 비막을 입고 흐리게 반짝인다. 몸 구석구석을 씻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