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카리브 바다에서 - 고은
소리끝
2011. 3. 26. 00:21
카리브 바다에서
벌거숭이 산등성이 같은 다른 나라들의 고통을 모르는 구두쇠로
내 나라의 갖가지 고통만을
큰 소리로 떠벌여왔다
한국통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런 책들의 뚜껑을 덮고 떠나왔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적도 부근
나 혼자 세상 멀리 면목이 없다
세상은 갈수록 팍팍하다
여기는 누구나 죽으면 바로 물컹물컹 썩어버리는 곳이다
그토록 오랜 동무였던
수평선은 거짓이다
모든 태풍
모든 태풍 이전의 미풍
모든 것을 가진 일망무제의 파도 앞에서
나는 가방을 쌌다
-고은, <두고 온 시>, 창작과비평사
한국의 가슴아픈 근대사를 어루만져온 시인이지만 그 이전의 시대에 아직도 살고 있는 민중들을 본 고은은 마음이 숙연해진다. 자기가 가장 힘들다고 투정하는 사람이었던 듯이 고은은 자신의 불찰을 반성한다. 누구보다도 더 민중을 위해 시를 써왔던 그에게 타국의 (가치 판단 없는) 후짐은 또 다른 짐으로 다가온다. 넓은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힘든 친구를 만난듯이.